소설로 연암을 만나다.

  연암 박지원은 현실에 따라가려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양반층을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 그리고 그는 여러 풍자소설을 썼지만 나중에 정조대왕 앞에서 깍듯한 글씨체로 반성문을 써야했다.

이제 그의 소설 5개 : 광문자전, 양반전, 예덕선 생전, 호질, 허생전을 차례대로 살펴보겠다.

 

광문자전

광문은 거지의 우두머리 아이였다. 그러나 병든 아이를 간호하다 그 아이가 죽자, 다른 아이들이 광문이 그 아이를 죽였다고 생각하여서 광문을 쫒아내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이들이 그 죽은 아이의 시신을 강물에 던질 때 광문이 그 시신을 주워서 묻어 장사 지내주는 것을 본 부자가 광문을 데려다가 양종 상에 데려다가 양종상의 점원으로 만들어 주었다. 광문은 점원으로서의 신뢰를 쌓았지만, 자신의 얼굴이 못났다고 생각하여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주인공 '광문'은 일찍이 종로 거리로 빌어먹으며 다니는 거지인 광문의 거짓 없는 인격을 그려 신분에 관계없이 인간은 똑같다는 것을 강조하고 양반 사회를 은근히 풍자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광문을 중심으로 여러 거지 아이들의 생활, 그들 사이의 인정 깊은 인간관계를 실감 있게 묘사하면서 거지들은 비록 헐벗고 세상에 버림받은 존재이기는 하나 의리와 인정미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훌륭한 혈통을 타고나지도 못했고 비범한 능력을 가지지도 않은 못생긴 거지를 주인공으로 삼은 점, 거지이지만 성실한 마음씨와 신의 있는 행동으로 장안의 명사가 되는 점, 신분의 차이 없이 동등한 인격을 가진 인격체라는, 시대를 앞서가는 의식이 담겨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소설은 근대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문은 박지원이 창조한 새로운 인간형으로서, 새로운 시대에는 신분이나 지위보다는 성실하고 남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양반전

어느 한 고을에 예의바르며 효가 바른 양반이 살았다. 책만 읽어 가난하기 짝이 없었던 그는 매년 관할에서 쌀을 빌려다 먹었다. 그가 이렇게 살다보니 그 빌린 양이 거대하게 늘어났다. 이 장부를 본 사또는 무슨 양반이나 된 사람이 빌려다 먹기만 하느냐고 그 양반을 불러들었다. 그 쌀을 갚지 못하니 사또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 벌을 내리려고 하였다. 그 소식은 곧 그 마을 부자 평민의 귀에 까지 들어왔다. 그는 그 양반에게 가서 자기가 그 빛을 갚아주는 대신 그가 양반을 사겠다고 하는 것 이었다. 그 양반은 그에게 양반을 파는 대신 그 빚을 다 갚게 되었습니다. 그 평민은 양반이 되었다. 첫 번째 양반 매매 증서에는 형식과 가식에 얽매여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양반의 모습을 적었는데 평민이 부당하다하여 두 번째를 작성했다. 두 번째 매매 증서에서는 교양이 있는 척하며 개인적 이익과 부당한 특권을 남용하는 양반의 모습을 적었다. 그러자 평민이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셈이나 며 나가버리는데서 끝난다.

이 작품은 박지원의 초기작 가운데 하나로 조선 후기 양반들의 경제적 무능과 허식적인 생활 태도를 비판한 한문 소설이다. 그러나 양반이라는 특권 계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반이 양반답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 양반 매매 증서에는 형식과 가식에 얽매여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양반의 모습을 표현하였고, 두 번째 매매 증서에서는 지식과 교양이 있는 척하며 개인적 이익만을 취하고 부당한 특권을 남용하는 양반의 횡포와를 보여 줌으로써 양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예덕 선생전

엄행수는 똥을 치워 나르는 천한 천민이었으나 선귤자는 그에게 예덕이라는 호까지 지어주고 선생으로 대접하며 친하게 지냈다. 예덕 선생은 동네로 돌아다니며 똥을 져 나르는 일에 종사하는 미천한 사람이다. 선귤자의 제자 자목은 스승이 사대부와 교유하지 않고 비천한 엄 행수와 벗하는 것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것으로 내용이 시작된다. 선귤자는 이해로 사귀는 벗과 아첨으로 사귀는 벗은 오래 갈 수 없다고 말하고, 마음으로 사귀는 벗을 두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는 이어서, 엄 행수는 신분이 천하고 하는 일은 더럽지만, 마음이나 행동은 의롭기 때문에 의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 작품은 선귤자가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인물인 엄 행수는 인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해 바람직한 벗의 도리를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선귤자의 제자 자목은 자기의 스승이 똥거름을 지어 나르는 미천한 신분에 있는 엄 행수와 교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 선귤자는 엄 행수의 가식 없는 삶과 분수를 지키고,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행하는 엄 행수와 사귀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그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호질

대호가 해가 지자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는데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귀신들과 의논하여 의사를 잡아먹자니 의심이 나고 무당의 고기는 불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청렴한 선비의 고기를 먹기로 하였다. 이 때 고을에 이름이 있는 북곽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동리자라는 과부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자, 그녀의 아들들이 북곽을 여우로 의심을 하여 몽둥이를 들고 어머니의 방을 습격하였다. 그러자 북곽은 허겁지겁 도망쳐 달아나다가 그만 어두운 밤이라 분뇨구덩이에 빠졌다. 겨우 머리만 내놓고 발버둥 치다가 기어 나오니 이번에는 큰 호랑이가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호랑이는 더러운 선비라 탄식하며 유학자의 아첨, 이중인격 등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북곽선생은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목숨만 살려주기를 빌다가 머리를 들어보니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아침에 농사일을 하러 가던 농부들만 주위에 서있었다.

이 작품에는 우화적 성격이 있다. 우화엔 인간의 모든 기능을 구비한 인간으로서 자유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는 신격화된 존재인 범을 등장시켜 위선적 도학자 북곽 선생의 행태를 신랄히 풍자, 비판한 이 작품은 이러한 우화적 성격을 드러낸 작품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성품이 범이 갖는 짐승의 성품만 못할 수 있다는 연암의 인성론을 살펴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위선적이고 영악한 북곽 선생의 모습을 당시의 유학자의 전형으로 보았을 때,

작자는 '범'을 풍자의 주체로 내세워 당시의 유학자들의 위선적이며 이중적인 인간성을 이 작품을 통해서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성품이 범이 갖는 짐승의 성품만 못할 수 있다는 박지원의 의견을 살펴 볼 수 있게 된다.

 

허생전

이 이야기의 주인공 허생은 남산골 선비이다. 그는 이미 몰락하여 쓰러져 가는 초가에서 독서에 열중할 뿐, 전혀 생계를 돌보지 않는다. 굶주리다 못한 아내가 나가서 노동이나 장사라도 하든지, 아니면 도둑질이라도 하라고 했다. 그러나 허생은, 노동은 익히지 못했고, 장사는 밑천이 없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허생은, 부자인 변승업을 찾아가 돈 만 냥을 빌려 전국의 과일을 독점해 큰 이문을 남기고, 또 말총을 전부 들여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또, 도적의 무리를 이끌고 어느 빈 섬에 들어가 농사를 짓게 하더니, 거둔 곡식을 배에 싣고 다른 곳에 내다 팔아 더 많은 돈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을 써서 나라의 경제를 어지럽히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50만냥을 물 속에 던져 버렸다. 또, 40만냥으로 빈민을 구제하고, 변승업에게 가서 10만 냥을 갚는다. 또 어느 날, 변승업의 소개로 이완이 찾아오자, 그의 북벌 론을 비난하고, 이완을 칼로 찌르려고 하여 도망치게 했다. 그 후, 허생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말기의 무너진 경제체재를 비판하는 글로써, 허생이 조선의 경제를 잘 이용해서 돈을 버는 이야기이다. 허생이 굶주린 빈민들에게 쌀을 주는 모습과 도적떼가 들끓는 것으로 보아 말기의 치안 등등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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