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민 씨 인터뷰

 
 

얼마 전 장애등급 재판정으로 등급이 떨어졌다는 박혜민(34) 씨.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부터 8m, 누군가에게는 1분도 안 걸리는 거리겠지만 박 씨에게는 몇 분 동안 많은 걸음을 옮겨야 다다를 수 있는 거리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커피가게로 들어가던 중, 박 씨는 문 앞에 위치한 7㎝ 높이의 단을 오르는 데 잠시 머뭇거렸다. 박 씨가 호흡을 가다듬고 단 위를 오르는 순간, 박 씨는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을 것처럼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박 씨는 미숙아로 태어나 작은 몸집과 뇌병변장애로 가파른 길이 아니어도 걷기 힘들다고 했다. 버스로 한 번에 20~30분이면 가는 거리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버스에 타고 내릴 수 없어 지하철을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한다. 승강기마저 없는 곳이면 박 씨의 목적지 도착 시간은 배로 늘어난다. 혼자서는 에스컬레이터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

“대학원을 다닐 때 어느 복지관에 들러야 하는 일이 생겨서 가고 있었어요. 복지관이 있는 동네 지하철역사가 시내가 아닌 외곽에 위치해 있어 평소보다 더 부지런했어야 했는데 늦잠을 잤죠. 그날따라 비까지 내리고 사람들도 많아 움직이는 게 더 불편했어요. 도착해서 내리려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미끄러지면서 허벅지가 전동차와 타는 곳 사이에 껴버렸어요. 다행히 사람들이 도와줘서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가끔 내릴 때마다 떠올라서 아찔할 때가 있어요.”

걷다가 혹은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턱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멍들고 손바닥이 찢어지는 것은 일상. 박 씨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활동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뇌병변장애 3급’이라는 꼬리표는 늘 박 씨를 긴 계단과 위험한 상황이라는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그런 ‘뇌병변장애 3급’조차도 박 씨에게 너무 분에 차는 판정이었을까, 박 씨는 지난 9월 12일 장애등급 재판정을 받은 결과 ‘뇌병변장애 6급’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박 씨가 6급으로 떨어진 것은 ‘보행 및 일상생활동작 평가(수정바델지수)’에서 123점 중 90점~96점 사이에 속하기 때문. 수정바델지수는 뇌병변장애인을 대상으로 개인위생, 목욕, 식사, 용변, 계단 오르내리기, 착·탈의, 대변 조절, 소변 조절, 이동, 보행, 휠체어 이동 등으로 나눠 이뤄진다.

장애계단체는 수정바델지수가 장애인 개개인에게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평가 도구일 뿐, 장애등급 판정을 매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폐지 및 전면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수정바델지수는 말 그대로 보행 및 일상생활동작 평가에 지나지 않을 뿐, 이를 기준으로 장애등급을 판정하면 같은 정도의 신체·기능장애가 있어도 판정 결과가 아주 다르게 나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배뇨·배변조절이 가능하면 배점 상 장애등급이 떨어지고, 뇌병변장애 특성 중 하나인 언어장애를 합산에 넣을 구체적인 방법이 없는 등 허점이 많다는 것.

박 씨는 “이제 다 커서 건강상태나 이런 것들이 나빠지면 더 나빠졌지 좋아질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뒤 의무적으로 재판정 받아야 한다는 게 의미 없고 우습다. 이런 판정을 받기 위해 본인부담금 11만 원을 들였다니 억울하고 화난다. 정말 나에게 맞는 서비스를 지원해주기 위해서인가.”라고 분개했다.

그 역시 실제로 계단을 오르내릴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계단 위에서 허비함과 동시에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사고의 위험을 고스란히 느껴야 한다. 경직이 올 때면 불안함은 더욱 커지고, 옷을 벗고 입을 수는 있지만 왼손을 거의 쓸 수 없어 A4 한 장 분량의 문서를 작성하는 데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하지만 박 씨의 6급 판정 이유는 개인의 환경 및 욕구가 아닌 ‘서류’뿐. 박 씨는 이번 장애등급 재판정 결과에 대해 지난달 27일 이의신청했다. 그는 이의신청하기까지도 웃지 못 할 일들이 있었다며 소개했다.

“장애등급 재판정이 서류상으로는 4월 24일 났어요. 전화번호를 바꾼 적도 없는데 ‘연락이 안됐다’는 소리와 함께 9월 12일 통보 받았어요. 집에서 동주민센터까지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게다가 결과 통보는 우편으로 오지도 않았어요. 관련 담당자가 대뜸 ‘복지카드 달라’고 했고, 6급으로 떨어진 것을 확인했어요. 이의신청을 제기하고 싶다고 하니 ‘일정 기간 지나야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알아보니까 통보 받은 뒤 3개월 안에 할 수 있다는데……. ‘돈도 들어가니까 이의신청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어요. 너무 어이가 없었죠.”

박 씨는 장애등급 판정 기준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는 장애등급제가 없어져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고 밝혔다. 개인의 환경 및 욕구에 맞는 서비스가 필요하며, 그러한 면에서 장애등급제 폐지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

박 씨가 경상남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언 6년. 그는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박 씨는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개인적인 꿈은 잠시 접어두고 꾸준히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장애물이 놓인 현실 앞에서 부모님이 계신 경상남도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혼자 33m²(10평) 남짓한 공간에서 움직이는 데는 문제없어요. 하지만 나는 집안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집밖에서도 살고 있잖아요. 3급일 때나 6급일 때나 이동할 때의 어려움은 달라질 게 없어요. 3급일 때도 정부에서 정한 장애인콜택시 대상자가 아니었잖아요. 부모님과 따로 살기 때문에 가스비 지원이나 자동차 할인도 저와는 상관없어요. 정부의 말대로 ‘꼭 필요한 사람에게 서비스가 지원될 수 있도록’, ‘사각지대에 혜택이 갈 수 있도록’ 장애등급 판정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인 것 같아요. 등급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사람이 아닌 동물취급 한다고 느껴져요. 이렇게 몸소 장애등급제 판정의 불합리함을 겪고 보니 내 상태가 그들이 말하는 등급이 맞는지 묻고 싶어요. 과연 그 기준에 맞는 장애인이 몇 명이나 될까요."

커피가게를 나선 박씨는 또 다시 힘겹게 단을 내려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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