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고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

 현대인들은 자신의 부족한 독서량을 걱정하면서도 노력이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며 나의 독후감을 적어본다.

 어느 날이었다. 좁은 교실에 모인, 비교적 많은 인원의, 내가 속한 집단은 ‘문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날은 유독 하늘이 맑고 화창했다. 창밖을 보며 우리의 낭비되어가는 청춘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나는 ‘박태원’의 수필을 읽고, 선생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교과서에 그려진 그의 용모가 인상 깊다. 그의 머리카락. 그에 대한 궁금증을 느끼게 만든다. 문득,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내던 말소리에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글귀를 찾아낸다. 나는 그 책을 읽기로 작정한다. 

 집을 나선 구보는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자신의 눈과 귀에 의혹을 갖는다. 그리고 자신을 신경쇠약이라 칭한다. 이 글에서 그가 만나는 이는 대부분 병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는 여급과의 대화에서 세상의 모든 이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언급한다. 이 글이 쓰인 시기는 1930년대, 바로 일제강점기 기간이다. 이 시기는 일제의 억압이 극에 달하고, 문화 활동마저 자유롭지 못했던 때이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글귀가 있다. ‘약으로 병을 고치듯이 독서로 마음을 다스린다.’ 작가는 그 시대 사람들의 불가피한 병듦을, 그리고 지식인들이 맞닥뜨린 현실에 대한 회의감을 표현하려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마땅히 읽고 쓸 수 있는 환경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고통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를 의아해하던 찰나, 구보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물질만능주의를 제시한다. 그것은 마땅히 당대인들을 불행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정이 만발하던 사회가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개인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구보는 병을 앓는 것보다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현대의 이기주의는 그때의 물질만능주의와 더불어 우리가 무정한 사회에 살게 한다. 나는 연립주택에 살고 있다. 집을 나서기 위해서는 항상 1층에 마련된 주차공간을 지나야 한다. 그곳은 함께 살아가는 인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이웃 간 불화를 낳는다. 어떤 이는 자신이 남을 위해 차를 옮겨야 하는 수고에 분개하기도 한다. 아래층에 사는, 키 작고 뚱뚱한, 전형적인 노년의 남성이 대추처럼 발개진 얼굴로 아버지에게 핀잔을 놓던 모습을,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기억한다. 그 얼굴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길을 옮기다 내 몸이 굶주림을 느꼈다.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곳은 ‘1등 2회’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입에 넣을 만한 것을 찾으며, 작은 종이를 들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한숨을 푹푹 쉬는 이, 눈이 충혈된 이, 주름이 깊은 이, 무표정한 이··· 밝은 얼굴은 찾기 어려웠다. 이 모습이 소설의 ‘개찰구 앞 두 남성’과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그들이 금을 갈망하듯 인생의 끝에서 새로운 인생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 모습이 그때와 현재의 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구보는 고독을 피하고, 행복을 찾기 위해 전차에 오른다.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자신이 내려야 할 곳을 알지 못한다. 아무 계획이 없는 삶. 현대인들은 그의 삶을 동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의미 없는 그러한 일과 중에서 자신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 순간, 구보가 만난 적 있는 여인이 전차로 들어섰다. 그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강렬한 듯하다. 때문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지만, 서로 모른 체하고 만다. 그리고 내 감정을 동요시킨 글귀가 그 종이에 적힌다.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이에게, 자기의 기억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에게 있어서 든 외롭고 쓸쓸한 일이다.’ 이 글을 읽으며 김춘수의 시, ‘꽃’이 기억났다. 구보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 자신이 함께할 사람, 무엇보다도 인식에 대한 갈망을 느끼고 있다. 또한, 그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전차에 타고 있는 이들은 마땅히 그들만의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대한 기대감, 즉 행복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구보는 그러지 못하기에 고독감을 느낀다.

 전차, 나는 편의점에서 산 음식을 우적우적 씹으며 지하철로 향한다. 약 10년 전부터 그것을 타기 시작한 나는, 빙판 위를 달리는 운동을 했었다. 그때 내 기억 속의 지하철은 놀이터였다. 깡충 뛰며 손잡이에 손을 대고, 기둥을 잡은 채 빙글 돌곤 했다. 성장하며 소년의 꿈은 부상에 부딪혀 좌절되었고, 순수했던 그는 이제 작은 책상에 놓여있다. 

 요즘 다시 지하철을 타기 시작했다. 학업을 위해서이다. 그 속에서 나는 구보처럼, 다른 이들의 생활을 관찰한다. 그 열차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속한다. 남녀노소 그 외양은 다르지만, 행동은 비슷하다. 모두 귀에는 어떤 것을 꽂고 있고, 밝은 빛이 나는 작은 기기로 세상을 엿본다. 나는, 그들 사이의 거리감을 관찰한다. 누군가의 인식을 갈망하던 구보에 따르면, 이 공간은 지옥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그 기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이렇게나 조용한 공간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어르신에게 자리를 비켜주곤 했고, 어깨를 맞댄 이와 실없는 대화를 나누곤 했던, 그렇게 화목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렇게나 작은 공간에 갇힌 채, 눈앞의 사람은 당연하게 무시하고 만다. 그 공간에 담긴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또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리워하지만 만날 수 없는 이, 함께 있다 멀리 떨어져 버린 이, 한 줌의 소망과도 같은 이··· 어쩌면, 그들과의 연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인식과 부름의 행복, 그것을 찾기 위해 그들은 그 기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문득, 이제 내릴 시간이 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늦을 대로 늦어버린 시간, 새벽 2시, 구보는 집으로 돌아간다. 부슬비 내리는 종로 사거리, 발길이 끊임없다. 현대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슬픔과 고달픔에 잠 못 이루는 이들의 떠도는 모습. 한적하게 뜬 달과 별에 위로를 갈구하는 모습. 그 모습 속에서 구보는 어머니를 겹쳐본다. 구보는 집을 나설 때, 어머니의 일찍 돌아오라는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을 뉘우치며 그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그의 부인 없음과 일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변함없이 그를 사랑한다. 생각의 끝에서, 그는 자신의 행동이 그녀에게 종로의 방랑자와 같은 외로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시에 그는 어머니의 사랑에 감동한다. 그는 여인의 사랑이 어버이에서 남편으로, 그리고 다시 자식으로 이동한다고 표현하며, 그렇기에 힘 있고 거룩한 것이라 말한다. 그는 자신의 행복보다도 어머니의 행복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가족, 특히나 어머니라는 말을 들으면 형용하지 못할 감정을 느끼곤 한다. 따뜻하면서도 먹먹한, 슬프면서도 행복한, 감정의 두 극단 속의 어느 한 경계, 그것이 가족이 주는 감정일 것이다. 나는 외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현대 여인의 사랑은 자식에 멈추지 않고 자식의 자식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 사랑은 더 견고해지고, 더 노련해지며, 더 따스해진다. 그 사랑으로 나를 키워준, 내 일생의 친구이자, 영원할 것 같았던 조력자. 그녀를 이제는 뵐 수 없다. 그 일이 있기 전, 나는 잘못을 저질렀었다. 의식불명인 그녀에게 울먹이며 용서를 구했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은 그녀의 소리 없는 웃음에 잠시나마 멍청한 안심을 느꼈다. 병원에서 일주일, 아름다운 음성을 가진, 작고 고담했던 그녀는 그렇게 떠났다. 그 이후의 일은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남아있다. 그 충격을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니 나와 어머니는 병실에 누워있었고, 서로 애써 그 일을 모른 척해야만 했다. 어머니 또한, 할머니와 한순간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다. 나보다 더 힘들었을 때, 그녀는 나를 자신보다 먼저 챙겼다. 나는 순간 다짐했다. 절대 훗날 후회하지 않도록 살 것이라고. 나보다 어머니, 가족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겠노라고.

 어느 순간, 내 발길은 집에 도달해 있었고 이 소설의 마지막 글자를 읽으며 책을 덮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의식의 흐름 기법’, ‘원점 회귀’ 등의 글로 해석하려 든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그의 글을 읽을 때 가지길 바라는 마음일까? 문학기행의 일환으로 고재종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시를 쓸 때, 시 해설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고 밝혔다. 나는 정형화된 해설이 아닌, 독자 스스로 글을 읽어내려가며 의미를 궁리할 때, 비로소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하루의 이야기를 하며 인생을 담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머니의 품에서 태어나, 정해진 것 없는 길을 정처 없이 거닐다, 다시 천국에 있을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 배회 속에는 분명 사랑과 우정, 그리고 깨달음이 있다. 덧붙여, 그는 관찰의 힘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구보는 작가에게 있어서 관찰은 무엇에든 필요하다고 한다. 관찰에서 생각으로, 그리고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하나의 소설을 탄생시켰다.

 박태원의 모데로노로지오, 즉 고현학은 현대의 풍속세태를 기록해 장래의 발전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는 학문을 뜻한다. 관찰과 생각, 그리고 창작, 이를 통해 나는 성장을 이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나만의 고현학을 통해 장래의 발전을 이루겠노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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