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문화마을이라는 이름 안에 담벼락 위로 벽화가 그려지고 조형물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흔적을 기억하는 문화 공간으로 변화했습니다. 여전히 주민들이 생활하며 삶을 이어가고 역사를 기억하는 마을이 부산시 아미동에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국민들의 삶을 한순간에 뒤바꿨는데요. 전쟁 준비가 되지 않은 남한은 인민군에게 국토의 절반 이상을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민군은 전쟁 시작 단 며칠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남하했습니다. 게다가 한반도의 중심부에 있던 남한의 수도 서울 역시 인민군이 점령한 상황이었죠. 이에 정부에서는 긴급회의를 통해 안정적으로 수도의 역할을 할 임시수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피란민들을 보호할 수 있고 여러 국제기관과의 협력이 용이했던 항구도시 부산은 그렇게 임시수도가 됐습니다. 그 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국군이 서울을 탈환했지만,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또 한번 뒤바뀌게 됐습니다. 인민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했고, 국군은 38선 이남 지역까지 퇴각했는데요. 1·4후퇴로 인해 다시 한번 서울을 빼앗기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퇴각하는 국군을 따라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이때 수많은 피란민과 이산가족이 발생했습니다. 임시수도가 된 부산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으로 가득했고, 1·4후퇴 이후에는 47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가 80만 명까지 늘어났습니다. 거의 2배나 되는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려 평지에는 거처를 마련할 공간이 없었는데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피란민들의 몸부림이 빽빽하게 밀집된 부산의 산동네를 만들었습니다.

안전하게 몸 뉘여 쉴 수 있는 공간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습니다. 가파른 산은 중요하지 않았죠. 비석으로 가득했던 공동묘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피란민들은 묘지와 비석을 건축자재 삼아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보면 어떻게 비석 위에 집을 짓고 공동묘지에 마을을 이룰 수 있었을까 싶지만, 전쟁을 버텨내기 위한 선택일 뿐이었습니다.

피란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기 전, 이곳에는 일본인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었는데요. 강화도조약으로 부산항이 개항되면서 부산에 정착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게 되자, 복병산에 일본인 공동묘지가 들어서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자 거주지 확보를 위해 복병산에 있던 묘지가 아미동으로 옮겨졌습니다. 대신동에 있던 화장장도 이곳으로 이전됐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아미산 아래 계곡에 새로운 화장장도 생겼는데요. 화장장을 거쳐 묘지로 이동하는 죽음의 경계에 있던 아미동에 피란민들이 모여 삶의 의지를 깊게 뿌리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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