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이었던 공민왕의 삶

copylight홍유라 고려의 공민왕의 모습이다.
copylight홍유라 고려의 공민왕의 모습이다.

 고려의 제31대왕인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횡포가 끊이지 않고, 원과명의 교체기였던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공민왕은 권문세족 일파들을 제거, 천민변정을 설치, 정동행성 폐지, 그리고 몽고풍을 폐지하는 듯 희망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이때, 공민왕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신돈"이라는 승녀였다. 그는 천민변정도감이라는 기관을 주도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고, 토지조사를 하였다.

이때쯤, 고려의 중심세력을 권문세족에서 새로운 신진사대부라는 세력으로 변하고 있었다. 신진사대부는 우주 만물의 성질과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인 성리학을 사상으로 여겼다. 또한, 반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대부분 중소지주 출신이었다. 이들 또한 신돈과 같이 공민왕의 개혁에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토지제도를 개혁하는것이 고려가 살길이라 믿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탄한 길을 오래가지 않았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비록, 외세의 침입을 막을 순 있었지만 외세의 침입을 막는데 힙을 집중하느라 개혁정치에 집중이 불가능 해져서 중요한 개혁의 기회를 놓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흥세력인 신흥무인세력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들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한 대표적으로 최영과 이성계와 같은 사람들이다. 중요한 개혁의 기회를 놓친듯한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공민왕의 조언자였던 신돈이 살해되었고, 공민왕도 시해되었다. 이후, 개혁정치는 중단되었다.

비록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공민왕이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의 공민왕이 다른 나라에게 간섭을 받을 때 그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을 보며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때의 용사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만약 다시 이런 상황이 일어난다면, 일제강점기의 용사들과 공민왕처럼 강력하게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을 하여야 할 것 이고, 용사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가져야 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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