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애족 정신을 느낄 수 있었던 의미 있는 답사로 남아

  

 천도교 중앙 대교당에서 동천고등학교 답사 참가자들이 발대식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고있다
 천도교 중앙 대교당에서 동천고등학교 답사 참가자들이 발대식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고있다
  몇 년전 부터 일본의 역사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고대의 한반도가 자신들의 통치하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고조선·고구려·발해가 자신들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나는 그러한 계열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희소식이 나에게 다가왔다.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2012 천도교 청소년 중국 항일 유적지 답사‘에 참가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평소 한국사 공부에 흥미가 많았고,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특히 이번 답사단의 학생대표직을 맡게 되어 더더욱 기대가 컸다.

   7월 24일 새벽 5시, 1차 집결지인 동천고등학교에 도착한 우리는 4박 5일간의 대장정에 대한 들뜬 마음으로 출발 버스에 탑승했다. 우리가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서울 천도교 중앙 대교당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이번 답사의 총책임자이자 단장님이신 이범창 종무원장님을 비롯한 서울지역 답사단원분들과 합류하고 발대식을 거행했다. 발대식은 임운길 교령님의 격려사, 이범창 종무원장님의 인사말, 그리고 학생대표의 출정선언 순으로 진행되었다. 격려사에서 임운길 교령님은 단원들에게 유적지 답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웅대한 기상과 더불어 우리사회에서 인내천 사상이 지니는 가치를 인식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으며, 이범창 종무원장님은 답사 기간 동안 우리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뭉쳐 안전하고 뜻 깊은 행사가 될 수 있도록 결의를 다질 것을 당부하셨다. 그리고 단원 전체가 다함께 이번 답사의 출정을 선언하고 선서를 하는 것으로 발대식은 마무리되었다.

  발대식을 마친 후 우리는 중앙 대교당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한국 가이드님과 만난 뒤, 곧 바로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약 1시간의 짧은 비행 끝에 첫 번째 방문지인 대련에 도착했다. 대련은 중국 요동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변 도시로 인구가 35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이다. 또한 현재 중국에서 가장 깨끗하고 살기 좋은 3대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 청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에 조차되었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만주 경락의 거점으로 약 50여년 동안 조차되어 지금의 경관을 보여주는 도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대련에서 현지 가이드님과 합류한 뒤 얼른 식사를 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대련에서 연길까지 장장 1,200km 긴 거리를 이틀 만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그날 밤까지 단동에 도착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방문지 대련과의 아쉬운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4시간을 달려 단동에 도착했고, 그곳 호텔에서 우리는 중국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단동시내에 있는 압록강 철교. 바로 앞이 북한의 신의주이다.
단동시내에 있는 압록강 철교. 바로 앞이 북한의 신의주이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호텔에서 간단히 조식을 먹고 단동 시내로 향했다. 압록강 철교를 보기 위해서였다. 압록강 철교는 중국의 단동과 북한의 신의주를 잇는 다리로 1911년과 1943년에 각각 하나씩 가설되었었다. 그러나 하류 쪽에 먼저 가설된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는 중국에 연결된 절반만 남아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멀리 수백 미터 거리를 앞두고 북한의 신의주를 관차 할 수 있었다. 평소 갈 수 없는 곳, 바라볼 수 없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북한의 여러 건물들을 직접 눈으로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또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민족 분단의 현실과 통일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우리들은 역사의 아픔이 묻어있는 압록강 철교 답사를 마무리하고 다음 답사지로 이동했다.

  우리가 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은 집안시였다. 현재 23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집안시는 길림성에 있는 도시로 고구려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다. 도시 중심에는 국내성의 성벽이 남아있었고, 근처에는 환도산성과 박작성이 있었다. 우리는 집안시에서 점심을 먹고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퉁거우로 이동했다. 높이 6.39m, 너비 2m로 한국 최대 의 크기인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의 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것이다. 비석을 본 우리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학교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하고 웅장했기 때문이다. 네 면에 걸쳐 약 1,800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역대 고구려 왕들의 업적, 광개토대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 등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으로 인해 지워진 글자들도 많았다. 최근 일본 역사학자들 중 일부는 이를 이용하여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고 한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역사 왜곡의 내용을 그 현장에서 직접 들으니 우리 민족의 유적이 다른 나라에 있다는 현실이 정말 안타까웠다. 광개토대왕릉비 답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바로 옆의 광개토대왕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개토대왕릉은 오랜 시간 때문에 대부분 무너져 내려 예전의 모습을 거의 상실했지만, 그래도 고구려의 기상과 웅장함은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나 과거 수 차례에 걸쳐 도굴되어 여러 문화재를 볼 수 없다는 점은 매우 안타까웠다. 다음 답사지는 장군총이었다. 장군총은 한변 길이 33m, 높이 약 13m인 고구려 시대의 돌무지돌방무덤인데, 현재 장수왕의 무덤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장군총은 앞서 봤던 광개토대왕릉과는 다르게 외형이 거의 완존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매우 거대하고 웅장했다. 그러나 장군총 역시 안타깝게도 고분의 유물이 모두 도굴된 상태였다. 그렇게 장군총 답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고구려 유적 답사를 마무리했다. 고구려의 역사와 그 높은 기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곧 바로 다음 날의 백두산 등정을 위해 퉁화역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퉁화역에서 기차를 밤새 타야지만 백두산이 있는 이도백하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집안시 일대에 폭우가 내려 퉁화로 가는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우리 답사단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집안시에서 퉁화로 이동하는 기차까지 끊겨버려 버스로 퉁화에 가기 위해선 기존의 길을 멀리 우회하여 13시간가량 이동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북간도 지방의 항일유적지와 천도교유적지, 그리고 민족의 성산 백두산를 답사한다는 결의를 다지고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리더라도 버스를 타서 이도백하에 도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중국에서의 이튿날 밤은 버스에서 보내게 되었다.

 

백두산 천지의 물이 빠지는 유일한 통로인 장백폭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백두산 천지의 물이 빠지는 유일한 통로인 장백폭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눈을 떠보니 이도백하의 한 식당에 도착해있었다. 전날의 피로 때문인지 버스에서의 13시간은 그리 길지 않게 느껴졌다. 이도백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 위치한 도시로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침에 들린 식당 역시 조선족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음식 맛이 한국과 많이 비슷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버스로 30분가량 다시 이동하여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백두산 중턱, 장백폭포, 천지로 가는 길은 모두 순환버스로 이동이 가능했다. 우리는 세 코스 모두 순환버스를 이용했다. 그런데 의외로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이 하루 평균 4만여 명 정도인데, 그 대부분이 중국인이라는 점이다. 알고 보니 얼마 전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중국 10대 명산에 선정하였고, 그 결과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원래 백두산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관리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중국이 직접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백두산이라는 명칭은 중국식의 이름인 장백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순환버스를 20분정도 타고나니 장백폭포에 도착했다. 중국 동북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장백폭포는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천문봉과 용문봉 사이 골짜기를 따라 흘러가다가 낙차 68m로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이다. 백두산이 여전히 살아있는 화산임을 증명하듯, 장백폭포 주변 냇가에는 군데 군데 김이 나고 있었다. 장백폭포는 우리의 속을 뻥 뚫을 정도로 시원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기다란 물줄기가 암벽을 타고 흐르는 그 모습은 아직도 생생할 정도로 멋있었다. 장백폭포에서 단체 기념촬영을 한 뒤 우리는 백두산 답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천지로 향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순환버스를 통해서 이동했는데 엄청난 인파가 천지의 인기를 말해주는 듯 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바로 천지 주위의 날씨였다. 천지 주변은 날씨 변화가 굉장히 심하다고 한다. 아래에서는 맑은 날씨이더라도 천지 주변에서는 구름이 많이 끼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고 한다. 천지를 완벽히 볼 수 있는 날은 한 달 중 서너 날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걱정은 천지에 도착하자마자 환호로 바뀌었다. 바람이 많이 불긴 했지만 천지의 날씨가 매우 맑고 화창했기 때문이다. 현지 가이드님도 이렇게 쾌청한 날씨는 드물다고 했다. 아마 우리가 전날의 위기를 헤쳐내고 힘들게 백두산에 오른 것에 대한 보답인 듯싶었다. 우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천지를 감상하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천지는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그 드넓고 장엄한 천지는 마치 과거 항일투쟁 당시 우리 선조들의 정신력과 용기의 발자취를 드러내는 듯했다. 우리 모두 천지를 바라보며 하나가 되었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민족의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백두산에 오르기 바로 전날과 뒷날에는 천지가 구름속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 우리는 천지를 온전하게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꼈다. 각자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것을 끝으로 우리는 백두산에서의 일정을 마쳤다.

 

맑은 날의 백두산 천지모습. 넓은 천지가 우리 민족의 정기와 기상을 나타내는 듯 하다.
맑은 날의 백두산 천지모습. 넓은 천지가 우리 민족의 정기와 기상을 나타내는 듯 하다.

  다시 이도백하로 와서 점심식사를 한 뒤 우리는 버스로 3시간을 달려 청산리 유적지에 도착했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21일에서 26일까지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연합부대가 일본군을 대파한 승전을 말한다. 청산리 유적지에는 그 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청산리 대첩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청산리 대첩 기념비는 2001년 청산리기념사업회가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건립하였는데, 기념비의 앞면에는 일본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우리 선조 독립군들의 모습이 당당하게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순국하신 선열들에 대한 묵념을 하고 대첩 승리에 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교과서 속에서만 배웠던 청산리 대첩의 현장을 직접 와서 보니 가슴에서 뜨거운 그 무언가가 달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청산리 유적지 답사를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날의 일정을 마쳤다. 우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라 할 수 있는 연길시로 이동한 뒤, 그 곳 호텔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의 모교인 대성중학교(현재 용정중학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의 모교인 대성중학교(현재 용정중학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날이 밝자 마자 우리는 용정으로 향했다. 용정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 선조들이 대거 이주하여 서전서숙, 명동학교 등 나라의 독립을 위한 많은 학교들을 세운 장소이다. 우리는 먼저 동흥중학교 옛터에 갔다. 현재는 용정 제3중학교로 바뀌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동흥중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동흥중학교는 천도교가 세운 학교로 우리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답사지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식을 거행하고 천도교의 애국 애족 정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 답사지로 우리는 대성중학교로 이동했다. 현재 용정 제1중학교로 명칭이 바뀐 대성중학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에는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었다. 우리는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겨 용정을 비롯한 과거 간도 지역의 항일투쟁 역사와 교육기관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설명은 현재 용정 제1중학교에 재직하시는 선생님께서 직접해주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용이 쏙쏙 귀에 들어왔었다. 대성중학교 답사를 마칠 때 즈음 우리 답사단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동흥중학교 옛터에 세워진 용정 제3중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우리를 만나고 싶다는 것 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용정 제3중학교로 떠났다. 교장선생님은 우리들을 매우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이후 교장선생님은 우리 답사단의 선생님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셨다.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으셨는데, 그 중에는 앞으로 있을 답사단과 용정중학교 간의 협력관계를 다지는 이야기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용정 답사는 매우 의미가 컸다.

  용정에서의 답사를 마치고 우리는 연길역으로 향했다. 연길에서 대련까지 열차로 이동해야했기 때문이다. 열차는 18시간을 달리는 침대열차였는데, 열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던 덕분에 친구들과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하고 선생님들과도 여러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차창 넘어 그려진 간도 땅의 평화로운 전경을 감상하며 잠이 들었다. 그렇게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보니 열차는 어느새 우리가 첫날에 방문했던 대련에 도착해있었다. 그곳에서 조식을 먹은 뒤 우리는 러시아거리로 갔다. 과거 대련은 러시아의 통치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대련에는 아직도 러시아의 문화가 남아있는 곳이 많은데, 러시아거리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시장 체험을 해보며 기념품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성해공원으로 몸을 옮겼다. 성해공원은 대련 10대 명승지에 꼽히는 해양공원으로, 그 규모가 동북지역 최대라고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중국의 발달된 문화와 도시 경관을 감상 할 수 있었다. 성해공원에서의 넉넉한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이번 답사의 마지막 일정인 여순감옥으로 향했다.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 등 많은 독립지사들께서 수감되셨던 여순감옥.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 등 많은 독립지사들께서 수감되셨던 여순감옥.

  1902년 러시아가 동북 3성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하기 시작하다가, 러일전쟁 후 일본이 확장한 여순감옥은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감옥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여순감옥에는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들이 수감되었는데 대부분 항일지사와 사상범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온갖 고문을 당하고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그 중에는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와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 선생 등이 포함되어있었다. 여순감옥에 들어서는 순간 이전과는 다르게 모두들 경건한 마음으로 답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순감옥을 둘러본 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순국선열들을 추모하는 묵념과 추도식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는 이 분들의 피와 애국애족 정신에 대해 진정으로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가 지녀야 할 정신과 가치에 대해서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게 여순감옥 답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4박 5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였다. 대련으로 이동하는 버스 내에서 답사단원 모두가 답사에 대해 소감을 발표해보는 시간도 가졌다. 버스는 어느새 대련공항에 도착해 있었고, 첫날에 그랬던 것처럼 1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한국 인천공항에 돌아왔다. 그곳에서 동천고등학교팀 일행은 이범창 종무원장님을 비롯한 서울지역 답사단 참가자분들과의 아쉬운 헤어짐의 시간을 가진 뒤 부산으로 내려와 해산했다.

  4박 5일간의 일정은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고구려에서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느껴볼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경험이 되었다. 고구려 유적지에서는 우리 민족의 용맹함과 높은 기상을, 항일투쟁유적지에서는 애국애족 정신을, 그리고 백두산에서는 우리 민족 우리 겨레의 얼과 정기를 인식할 수 있었고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었다. 이번 답사를 참가할 수 있었다는 것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는 것에, 남들이 얻지 못한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에 모두 감사한다. 나는 이번 답사에서 얻은 그 깊은 가르침을 떠올리며, 앞으로는 내게 주어진 일에 있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나아가 우리나라, 우리민족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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