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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라운드 챔피언을 향해!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권투선수 박종팔
웰페어뉴스 기자  |  openwelc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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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02  10: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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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잘 나갔던 박종팔도 이렇게 뭉개지더라. 하지만 참고 견디다보면 항상 좋은 날은 돌아온다. 운동할 때 보면 알겠지만 넘어졌을 때 안 일어나면 어떻게 챔피언을 땄겠어요. 항상 넘어져도 일어나서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해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저는 IBF WBA 슈퍼 미들급 챔피언 박종팔입니다.
 

저는 원래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새 어머니가 오셨고, 집에 들어가기 싫어 가족 몰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때가 15~16세였는데 무작정 밤 열차를 탔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사촌형의 집에 머물렀는데, 아버지께서 도망간 자식도 자식이라고 영등포역으로 쌀 두 가마니를 보내주셨습니다. 쌀을 찾으러 가는 길에 우연히 권투체육관이 눈에 들어왔는데, 순간 ‘저것이다!’는 생각했습니다. 사실 서울에 올라왔을 때 프로레슬링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배구, 육상, 씨름 선수로 뛴 경험이 있어 유독 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권투체육관이 눈에 들어왔고, 그렇게 권투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서울로 올라왔고, 권투를 시작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신인왕이 됐습니다. 당시 신인왕은 유명한 선수가 되는 길이자 챔피언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신인왕전 대회가 열리면 전국에 있는 수백 명의 선수들이 모였습니다. 신인왕전에 나가려면 보통 2~3년이 걸린다는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신인왕전에 뛸 수 있게 됐고, 그때의 감정은 지금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권투선수로 13년을 뛰면서 프로 전적 쉰 세 번을 싸웠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으라면, 일본 신인왕과의 경기입니다. 한국 신인왕과 일본 신인왕과의 경기였습니다. 다른 선수 세 명이 일본 신인왕에게 졌는데, 저는 딱 한 번 라이트 훅으로 경기를 끝내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처음에는 고생했지만, 명예도 쌓고 돈도 쌓아가며 부러울 것 없이 승승장구했습니다. 1979년~1980년 선수생활 초창기부터 1,500만 원~3,000만 원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동양타이틀을 17차 방어전한 뒤 반납했고, IBF를 8차 방어하고 반납했습니다. WBA에서는 3차에 졌습니다. 경기를 통해 생기는 돈으로는 땅과 집을 사는 데 썼습니다. 링에 오르기 전에 먼저 땅과 집을 계약하고 올라갔을 정도로 자신 있었습니다. 그때는 모을 때 더 열심히 모아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욕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은퇴 뒤 후배 양성을 위해 인천지역 두 곳에 체육관을 차렸습니다. 선수였을 때와 달리 시작부터 꼬였습니다. 프로모터(국제시합)를 하게 됐는데 권투위원회 회장단과 그 반대편 싸움 사이에 희생양이 됐고, 문화체육관에 2,500만 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생방송을 25분까지 대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시합을 치르지 못했습니다. 외국선수들의 항공료를 비롯한 모든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왔고, 형제처럼 지내는 회장의 ‘손해배상 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당시 회장이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었는데, 약속 이행을 ‘오늘 내일’하며 계속 미뤘습니다. 화가 나서 국회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비서관은 ‘의원님이 사무실에 계시다’고 하고, 보좌관은 ‘안 계시다’고 했습니다. 더욱 화가 나서 발로 문을 차고 들어갔더니,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욱하는 성격에 도자기 두 개를 깨고 회장의 멱살을 잡았고, 네 가지의 죄목으로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동안 모은 땅과 집이 있으니 ‘팔아서 복구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언을 얻고자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사회를 배워야 한다’며 술집 운영을 권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하나로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술집을 열었는데, 처음에는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친분을 빌미로 돈을 내지 않고 미루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미루고 미뤄 액수가 늘어나면 현금이 아닌 어음을 갖고 오고, 해당 어음이 부도가 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만 뒀어야 했는데, 아는 사람들의 부탁을 계속해서 믿었고 그게 결국 안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술집 운영이 실패로 돌아간 뒤, 놀음에 손을 댔습니다.

그렇게 몇 십억을 없앴는데, 또 다시 주변에 ‘부동산으로 얼마 투자하면 3개월 안에 원금을 주고 그 땅에 스포츠센터를 지어라’는 유혹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20년간 한국에서 굵직굵직한 곳은 다 돌아다녔고, 어느 날 보니 남아있는 것마저 전부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더욱 캄캄했던 것은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을 아내가 폐암 선고를 받고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올 때, 유채를 팔아 1만4,000원을 쥐고 있었습니다. 밤 열차를 타고 1만3,000원이 남았는데, 역전 귀퉁이에서 ‘돈 따먹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 놀음판에서 1만3,000원을 다 잃고 울면서 흑석동까지 걸어갔습니다. 제 인생의 2라운드는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가진 것을 전부 잃은 채 은행 빚과 신용불량만 남은 것입니다.

그때는 사람들을 용서하기가 어려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 ‘내 잘못이다’고 생각합니다. 술집을 차린 것도, 술값을 미루게 한 것도, 어음을 받은 것도, 전부다 제가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인생을 ‘3라운드’라고 정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초년, 중년, 말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1라운드, 2라운드, 3라운드로 나눈 것입니다. 1라운드에서는 부와 명예를 다 가졌고, 2라운드에서는 밑바닥까지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3라운드에서는 1라운드와 2라운드에서 얻고 잃었던 것들을 되새기며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지금의 아내가 늘 “그래도 본전은 했다. 이름도 남기고 사람들이 당신이 챔피언이라는 것도 안다. 다시해도 늦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강의도 하고, 체육관도 다시 하고, 후배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기 위해, 그렇게 3라운드를 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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