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 사진:연합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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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애국소녀 잔 다르크는 전쟁터에 뛰어들어 승리를 이끌어낸 구국 소녀의 이야기를 책으로 본 유관순은 시간이 날 때마다 기도 실에 가서 잔 다르크 처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ㆍ1 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은 탑골공원과 남대문역 등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 후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대한 독랍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에 시위 주동을 저지하는 총탄에 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날 일제 무자비한 총칼에 사례당 한 사람만 30여 명 부상자는 셀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관순는 만세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 곡으로 이송되었습니다. 

 1919년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경성 복심 법원으로 넘겨졌습니다. 하지만 이후 1919년 6월 30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는 과중하다고 판단 하여 징역 3년형을 선고 하게 됩니다. 이후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져 복역을 하게 됩니다. 원래 수용 인원은 5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방이었찌만 무려 35명이 곳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며 옥중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복중에 있던 독립운동가 들 뿐 아니라 재소들 까지 합세하여 3000여명의 수감자들이 참여 하였고, 그 만세 소리는 서대문 형무소를 넘어 거리까지 퍼져나갔고 형무소 주위로 많은 인파가 몰려 들어 만세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이일로 인해 옥중에 있던 유관순과 많은 애국자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관순은 굴하지 않고 밤낮으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옥중에서도 유관순은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수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라고 했을 만큼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20년 19세의 나이로 차가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영화로도 개봉될 만큼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인물, 유관순 열사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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