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삶과 죽음, 특히 요즈음 청소년기에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던 이 두 주제. 둘 다 추상적이고 막연하던 것이었기에, 특히 죽음이라는 것은 더욱 막연했던 단어가 아니었나 싶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아직 경험해보지도 못했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기분 또한 느껴본 적 없었기에 나에겐 더더욱 멀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너무도 갑자기, 준비할 시간을 갖기에는 너무 빠르게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다가온 듯 하다.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긴 했지만, 금요일에 입원하신 후에 바로 며칠 후인 월요일 오전에 급성 페렴으로 패혈성 쇼크가 오셔서 돌아가셨다. 병원이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못 뵙고 보내 드린 게 너무 아쉽다. 솔직히 너무 후회되는 게 많다. 내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손녀로써 한 번 애교를 부려 본 기억도 없고 잘 해 드리지도 못했다. 비록 할아버지도 무뚝뚝하셨지만 나에게는 참 잘 해 주셨었다. 그 연세에 시력이 1.0~1.5 정도로 건강하셨기 때문에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장례식 기간 동안 아빠의 절제를 보았다. 아빠는 평소에도 감수성이 풍부하고 효심이 깊어서 잘 우시는 편인데 쓰러지실 정도까지 서럽게 우실 것이라는 내 생각보다는 너무 씩씩하셨다. 이제는 장남으로써 전체 집안을 이끌어나가야 하니까 그 책임감에 그러신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상주(상의 주체)로써 계속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셨고, 어쩌면 누구보다 힘드셨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슬프게 오열하시는 모습을 많이 못 본 것 같다. 거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 나서 할아버지를 보내 드리는 마지막 순간에 서럽게 눈물을 터트리시는 것을 보고 나도 절로 눈물이 나더라.
  장례식 과정 중에서 한 가지 대단하다고 느꼈던 것은 우리나라 대표 기업 삼성에 대한 것이었다. 고모부께서 삼성전자에 부장으로 계시는데, 삼성에서는 회사 구성원의 부모님, 장인 장모님 등 상을 당하신 분이 있으면 거의 전 직원이 모두 장례식장에 참석해서 위문한다. 또한 직원 몇 명은 봉사로 음식 서빙, 여러 장례 과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일회용 수저, 접시, 식탁보 등을 모두 삼성의 이름으로 지원해 주시는 것까지 삼성의 도움을 꼽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삼성에는 노조가 없다는 이유를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다운 정신이 아닐까. 삼성을 포함하여 현대도 이렇게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한다.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우리나라의 유교적인 의식 때문에 예로부터 결혼식, 장례식 같은 경우는 거대하게, 즉 어떻게 말하면 허례허식한 모습을 많이 담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내가 처음 경험했던 장례식만 봐도 그렇다. 120평의 장례식장은 그렇다고 쳐도 몇 번의 제사를 위한 수많은 음식들과 생각보다 가격이 센 관과 수의 등 마지막 가시는 길에 좋은 것을 해 드리려는 마음은 나도 같기에 불만은 전혀 없지만 유교적인 식을 위한 비싸고 많은 용품들과 복잡한 절차들은 너무 허례허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과연 누구를 위한 장례식인 것일까.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약 1조원 정도가 장례식장 화환 비용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3~4일 정도 쓰인 후에 재활용도 없이 버려질 이 꽃들을 위해 사용되는 돈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이 돈을 국가적 차원에서 사용했으면 뭐라도 더 할 수 있었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와서 위문하는 것, 그리고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함께 해주는 문화는 매우 좋은 것 같았지만 유교적인 허례허식함은 조금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비록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문화라서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예를 들어 화환을 재활용한다던지, 제사는 여러 번에서 한두 번으로 줄인다던지 하는 조그만 변화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본다.
  상복을 입고 부모님 곁에 서 있으면서 또 하나 알게 된 문화가 있다. 조문객이 절을 두 번 할 때 상주들이 아이고아이고 하며 곡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곡을 하다가도 조문객의 절이 끝나면 바로 곡소리를 멈추고 맞절을 하는 것도 아직 어린 내가 보기에는 너무 형식적인 식으로 보였고, 바로 밥을 드리기 위해 안내하고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도 이상했다. 곡을 하는 것이 억지로 슬픔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 물론 곡을 하시다가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터뜨리셨지만, 많은 순간에서 혼란스러웠다. 궁금증으로 인해서 조사해 본 결과, 곡은 울음 자체가 아닌 의식 중에 하나로써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상례 중에 치러야 하는 의식의 하나라고 한다. 슬프든 그렇지 않던 반드시 해야 하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이다. 곡소리로 인해서 서러움을 달래준다는 말도 있다. 내가 몰랐던 많은 것을 알게 된 느낌이랄까. 요즈음 들어서는 이러한 문화가 사라지는 추세라고 하기도 하더라.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번에 운구하던 사람들, 즉 관을 옮기던 사람들이 진지함과 슬픔보다는 오히려 웃음을 띠고 운구에 임하셨다는 것이다. 보통 6~8명이 해 주신다는 운구,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거의 12~14명 정도의 아빠 친구분들께서 오셔서 도와주셨는데 내가 생각했던 장면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물론 할아버지의 묘지는 정말 사람이 혼자 올라가기에도 위험할 정도로 가파른 산 위에 있어서 운구하기에 그분들이 정말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장난처럼 웃으면서 일을 진행하시던 것과 중간 중간 돈을 주지 않으면 다시 내려가겠다는 말을 하는 희극성에 놀랐다. 처음에는 자기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진지하지 못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상식상에서도 그렇고 드라마에서도 그렇고 운구하시는 분들은 매우 슬프고 진지하신 이미지를 가지고 계시는데 많이 충격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본 건데, 아빠와 아빠 친구분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 때는 항상 이렇게 해 오셨다고 한다. 어차피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인데 괜히 침울하고 묵묵하게 있어봤자 좋을 거 없으니까 상주 힘나게 그러는 것이라고 하셨다. 즉, 모두 힘내고, 더 편하고 즐겁게 가시라고 그러셨던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문화였다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요즘에는 이렇게 운구하는 장례 문화도 사라져가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 가족이 정말 옛 전통을 잘 보존하여 행했던 것이었다. 사라져가는 문화를 체험해 보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새로웠고 뿌듯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 높은 산 위까지 엄청나게 무거운 관, 그리고 그 관을 받치는 철근들과 장식들의 무게까지 감당하셨던 많은 친구분들께 정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거의 막노동에 가까운,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일을, 그리고 가파른 산에서의 어떻게 보면 정말 위험했던 일을 그렇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해 주신 것에 감사하다.
  할아버지가 월요일 오전 아홉시 경에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 새벽 네 시 반에 묫자리가 잘 다듬어져 있는지 급히 전화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한다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번 계기로 인해서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 본 것 같다. 모의고사도 치지 못하면서 며칠 동안 밟은 장례 기간동안 평소에는 절대 생각할 수 없을 만한 것을 느끼고 고민해보아서 나름대로 귀한 시간들이었다. 할아버지의 동생, 즉 작은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는데, 작은 할아버지는 남들이 모두 자고 있는 캄캄한 새벽에 나무를 해 오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평생의 자신의 표본으로 삼아 살아오셨다고 한다. 비록 앞으로는 뵐 수 없지만 영원히 마음속에 묻어 오랫동안 할아버지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저작권자 © 복지TV부울경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