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연산을 재조명하다

폭군 연산을 재조명하다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한명인 연산군에 대해 알려진 사실을 돌이켜보면 부정적인 정보들이 압도적이다. 조선 제 10대 왕이며 성종의 아들로써 7세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충분한 세자 수업을 거쳐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12년간의 길지 않은 재위기간 동안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켰으며 극도의 폭정을 자행하다가 조선 최초의 반정에 의해 폐위된다. 물론 연산군 말기가 피로 물들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인격에 장애가 있는 음탕하고 기괴한 폭군이기만 한 것일까.
연산의 왕권 강화
연산군은 성종의 적장자로 매우 순조로운 조건에서 왕위를 계승한다. 이런 그가 왕에 책봉되자 마자 한 일은 모후 사사에 관련된 인물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은 삼사이다. 잘 알듯이 삼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며 국왕과 국정에 대한 광범하고 강력한 간쟁과 감찰을 기본 임무로 갖고 있었다. 선왕인 성종은 국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으로써 삼사의 권한이 보장하였고, 따라서 그 위상이 높아짐과 동시에 신권 또한 대폭 강화된다. 이것은 대신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국왕이 최고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수준 높은 유교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발전이지만,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왕권의 전제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구조라는 사실도 분명했다. 연산군은 부왕의 치세에 이뤄진 이런 체제를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지상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런 목표에 저해되는 모든 행동을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의미의 ‘능상(凌上)’으로 규정했고, 그것을 척결하는데 치세 내내 전력을 기울였다. 무오사화도 이러한 ‘능상’의 연장선 위에 있다. 즉위 4년째인 (무오년), 연산군은 조의제문 사건을 이용해 김종직의 제자들, 즉 사림일파를 참살하는데 그 명분은 이유 없이 할아버지 세조를 사림이 욕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폐모의 추숭시안에 대해 충돌한 것이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하는 것과는 달리, 폐모 추존에 대한 시비 또한 신권과 왕권 대립의 일부이다. 삼사는 성종 때부터 성장하여 대간의 간언을 거부한 국왕의 행동을 “영주(英主)의 위엄 있는 결단”이라고 칭송한 영의정 노사신을,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고 극언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대신들과 왕은 ‘능사’의 가장 큰 폐단이 삼사라는 것에 합의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연산군은 사림을 쓸어버리고 왕에 대한 도전을 권력으로 제압한 뒤 왕권은 더 강화시켜 전제화시킨다.
그런데 연산은 왜 이토록 왕권의 강화에 집착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버지 성종과 큰 관련이 있다. 성종은 원래 세자가 아니었는데 형인 예종이 예상 외로 너무 빨리 죽어 버려서 왕이 된 케이스이다. 따라서 세자 교육도 하나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되어버렸는데, 이것은 세조의 치세 동안 억압 받던 신하들에게 신권 회복을 할 수 있는 매우 주요한 기회였다. 따라서 신하들은 매일 같이 경연을 열고 왕을 성리학의 이상적인 군주로 키워내고자 한다. 또 한편 성종은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었으며 왕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는 열등감에 시달리는데 이런 왕과 신하들의 태도가 합쳐져서 성종은 작은 일에도 신하들을 설득하고 의견을 조정하는, 좋게 말하면 신중하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비효율적인 왕이 되어간다. 연산은 이러한 성종을 태어나면서부터 19년 동안 봐왔고 아버지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자신의 이상을 펴지 못하는 것을 굉장히 답답해 했다. 연산은 군주정인 조선에서 왕의 뜻은 무조건 관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신권이 왕권과 비등해지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이러하여 그는 왕이 되자 마자 왕권 강화에 전력을 다하게 된 것이다.
무오사화의 이면
몇몇의 책들은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이 사화 직전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연산은 사실 성종의 장례를 치를 때, 혹은 그 이전부터 폐모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는 것 일 것이다. 그렇다면 연산은 폐모의 일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자가 되어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때를 기다렸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왕권을 강화시키며 연산이 기다렸던 그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대비인 인수대비의 힘과 자신이 대적할 수 있을 때였을 것이다. 당시 인수대비는 중전 하나쯤은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을만한 힘을 가진 왕실의 가장 웃어른이었고, 아무리 폐비 윤씨의 일이 인수대비의 음모라는 것을 알았더라도 유교를 국교로 삼은, 게다가 인수대비의 세력이 큰 언간들이 건재한 조선에서 그것을 밝히거나 그것으로 계기로 인수대비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따라서 연산은 조용히 자신의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린 것이다.
무오사화를 거치면서 삼사는 상당히 온순해졌고, 연산은 그의 바람대로 전제적인 왕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치세를 준비해 온 왕들에게는 자신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연산은 높은 학문의 수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이상적 사회의 실현 보다 자의적인 욕구 충족의 기회로 사용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연산은 갑자사화가 끝난 시점부터 인수대비가 병석에 앓아 누울 때까지 연회, 음행, 사냥에의 탐닉, 금표(출입금지를 알리는 푯말) 설치와 민가 철거, 발언의 통제 등 극한적이고 기이한 황음(주색에 빠져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에 빠졌다고 한다. 이처럼 왕권의 일탈이 심각해지면서 삼사는 다시 간쟁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무오사화로 위축된 삼사가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은 역설적이게도 연산군 자신이 제공한 것이었다. 주목할 측면은 이런 흐름에 대신들도 동참함으로써 연산군 후반의 정국은 대신과 삼사가 연합하고 국왕이 고립되는 형태로 변모했다는 사실이다. 본원적으로 견제와 비판의 관계에 있는 대신과 삼사가 인식을 공유했다는 것은 이 시기 연산군의 폭정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당시 사관들이 사사건건 부딪히던 연산에 대해 호의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기록을 완전히 사실로 간주할 수는 없겠지만, 이 시기에 연산이 민심을 잃고 대신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행동을 보였음 에는 틀림이 없다.
갑자사화의 시작
이제 대신 모두를 적으로 돌린 연산은 더 이상 간접적이고 제한적인 숙청으로는 다시 왕권을 회복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정사에는 뜻도 없어 보이던 연산이 왕권 회복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일까? 더 이상 방탕한 생활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된 탓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좀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은 드디어 인수대비가 병석에 앓아 누웠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드디어 연산이 기다리던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왕권의 가장 거대한 적이었고, 윤씨 폐비 사건의 가장 큰 배후인 대비가 죽기 일보직전이니 모후의 일을 처리하기에 가장 좋은 때가 왔다고 느꼈을 것이다. 어찌됐든, 연산군은 그 전부터 파악되어 있던 외할머니 신씨를 궁으로 불러들여 시커멓게 변한 금삼을 전달하는 '의식'을 거행하는데 이 '의식'은 온 조정에 '자, 이제부터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를 테다. 그리고 당시의 일을 철저하게 규명할 것이다. 당시 아버지 편에 섰던 놈들은 모두 각오해라.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큰 잘못이 없는 자들은 지금부터 병석에 누운 대비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내 편에 설 것인지, 잘 생각해 보고 입장을 정하라.'라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시작된 갑자사화는 무오사화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239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피화되었고, 사형이 절반을 넘었다. 즉 그것은 전면적이며 가혹한 숙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화에 관련해서 가장 잘못 알려진 사항은 연산군이 폐모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되면서 광기 어린 보복을 자행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며 그런 중대한 일을 국왕이 10년 동안이나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연산군은 즉위 직후 폐모가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날 수라를 들지 않았다는 짧은 기록은 아들의 비통을 깊이 알려준다. 갑자사화에서 폐모 사건의 보복은 숙청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데는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그 사건의 본질적인 원인이나 목표를 구성하지는 않았다. 앞서도 말했듯이, 핵심적인 주제는 능상의 척결이었다. 폐모 사건은 선왕의 잘못된 판단을 저지하지 못해 현재의 국왕을 참척(부모가 자식을 잃는 것과 같은 지극한 슬픔)의 고통으로 빠뜨렸다는 이유에서 가장 심각한 능사로 간주한 것이다. 게다가 갑자사화의 이면에는 연산군을 중심으로 무오사화 이후 권력을 보위하던 임사홍, 신수근 등의 친위세력과 세조-성종대를 지나오며 공신전을 독점하고 기반을 구축해 온 신권 세력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숨어있는데 친위세력을 동원해 권신들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폭군 연산?
이렇게 살펴본 연산은 어느 문학이나 드라마 속에서 묘사되는 애정 결핍 증세를 보이는 광기 어린 폭군의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권 강화라는 일관적인 가이드라인을 내세워 대간들의 지속적인 사직 상소에도 굴하지 않는 강직함을 보이는 동시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기 위해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도 가지고 있다. 물론 두 번의 사화를 거치긴 했지만 세조나 다른 중국의 황제 중에서도 그만한 피 바람을 불러일으킨 이는 드물지 않으며 그 중에는 후대에 위대한 황제라 칭해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왜 유독 그만 훗날 폭군이라 불리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가 왕권을 강화시킨 뒤에 했던 행동들에 있다.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연산은 문이나 유학보다는 예술을 사랑하는 왕이었고 그 자신도 예술에 대단히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직접 처용무를 출 때에는 신하들을 포함한 모두가 넋을 잃고 연산을 쳐다보았고 슬픈 연기를 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치세를 과시하기 위해 연회를 자주 열고자 하였고 그 규모 또한 상당하였다. 아직도 많이 쓰이는 어휘 중 하나인 ‘흥청망청’ 또한 여기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연산은 자신의 연회에 1000명의 기생들을 동원하고자 하였고 이 기생들은 조선 최고의 기생들로써 ‘흥청’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 흥청들은 모두 노래 춤 모두에 능하고 미모까지 갖춘 이들이어야 했고 그 대상 또한 당대의 관기들로 한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발과정에 더욱 많은 노력과 돈이 들어 갔다고 한다. 그 중에는 현 대신들의 첩들의 대다수도 포함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수가 1000명이나 되다 보니 이런 재정상태의 지속이 1, 2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돈을 다 세금으로 충당해야 했던 백성들의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흥청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라는 뜻에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특유의 정치 감각으로 그 이전에 누구도 이루지 못했을 정도의 왕권 강화를 이뤄냈지만, 그 후에 펼칠 자신의 이상에 대한 계획의 결여와 자신이 이룬 전제된 왕권에 대한 과시욕이 그를 폭군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연산군 시대의 의미
아무리 군주정이라 하더라도 서양에서는 그 예시를 찾아 볼 수 없는 신하들에 의한 반정을 살펴 본다면 조선이 생각보다 개방적이고 성장의 가능성이 있는 국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폭정이 일어나 세금이 매일 같이 낭비되고 백성들이 핍박 받고 있다 하더라도 신분제를 나라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국가들은 역성 혁명이 아니라면 신하들에 의해 왕이 폐위 되는 예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가능한 일이었고 이것이 조선이 가지고 있는 자정작용으로써의 가능성, 즉 성장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연산의 폐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능상의 척결을 목표로 삼사를 포함한 신하 전체를 길들이려는 연산군의 시도는 중간에 강력한 왕권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처참한 실패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실패는 연산 개인 뿐만 아니라 군주정을 내세운 조선 왕조 전체에 있어도 쓰라린 상처였지만, 후대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그것은 왕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가 결과적으로 삼사의 위상, 즉 신권을 더욱 공고하게 했다는 사실인데, 기묘사화가 보여주듯이 삼사의 기능이 완전히 정착되기까지는 아직도 험난한 과정이 남아있었지만, 연산의 두 번의 사화를 통해 삼사도 나름대로 배운 바가 있었고 그를 계기로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선왕조가 경험한 초유의 정치적 파탄은 대신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국왕이 군림하는 수준 높은 유교정치가 현실에 더욱 원숙해지는 성장 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시련과 극복은 이런 측면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폐위 과정에서 당시 현실이 낳은 한계도 있었는데 그것은 중종반정 이후 인사척결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산군의 폐위는 사실 그 체제하에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불만세력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는데 이 반정을 빠른 기간 내에 성사시켜야 한다는 한계 때문에 연산 아래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이리하여 중종반정이 끝난 후 공신 목록을 보게 되면 연산군의 최 측근이었던 유자광과 같은 인물들까지도 일등 공신이라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반정세력이 연산을 폐위 시킨 뒤 연산이 근간을 흔들어 놓았던 유학 기반의 정치체계를 회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폐주를 부추기고 그에 동조한 자들을 처리하지 않고 그들이 그대로 권력을 이어가게 한 것은 그래도 당시 조선이 가진 한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참고 문헌 [네이버 인물사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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