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입법 조치와 예산 수반되지 않은 ‘공허’한 장애인 정책”

 
 
UN장애인권리협약이 2009년에 비준된 이후, 한국사회 내에서 장애인권리협약은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까.

21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UN장애인권리협약 이행증진을 위한 국제 워크숍’에서는 장애운동 현장에서 느끼는 장애인권리협약과 국내적 상황에 대한 지적과 제언이 이어졌다. 특히 장애인권리협약과 관련해 2011년 제출된 정부 보고서와 현실이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한국장애포럼(Korean Disability Forum, 이하 KDF) 박경석 상임대표는 ‘장애등급제 폐지 운동’과 ‘정부의 여성장애인 예산 삭감’ 등을 통해 한국 사회 속 장애운동 현장에서 장애인권리협약 이행의 필요성과 한계를 이야기 했다.

장애등급제 폐지, 정부의 구체적 계획과 예산 반영 노력 미흡

현재 한국의 장애계에서 가장 큰 운동이라고 한다면 장애등급제 폐지를 꼽을 수 있다.

장애를 의학적 기준에서 판단하고 장애인에게 등급을 매기는 제도에 대해 폐지를 요구하고 있는 운동은 2010년부터 시작됐으며, 장애계는 지난해 8월부터 458일째 광화문광장 지하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박 상임대표는 “장애인권리협약에서는 ‘장애는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개념이며, 손상을 지닌 사람과 그들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사회에 완전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저해하는 태도 및 환경적인 장벽 간의 상호작용으로부터 기인된다는 것을 인정하고…….’라고 정의하고 있다.”고 장애관점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장애인권리협약은 헌법에 의해 체결·공포된 조약으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 만큼, 장애인권리협약 비준 국가라면 같은 목표와 정의를 갖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한 한국정부가 협약에서 말하는 장애관점에 맞춰 사회적 인식과 정책 방향 변화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

장애등급제 폐지와 관련해 한국정부는 2010년과 2011년, 반대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이후 장애계의 농성 투쟁이 계속되고, 대통령 선거 시기와 맞물리며 장애등급제 폐지를 공약으로 채택해 추진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부는 ‘현행 6급으로 나뉜 장애등급 기준을 단순화해 2017년 완전 폐지하겠다’는 입장만을 발표할 뿐, 구체적 계획이나 예산 반영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결국 장애인권리협약이 비준은 됐지만 정부의 적극적 정책 추진 의지가 없어, 실효성과 영향력이 우려된다는 것이 장애계의 입장이다.

박 상임대표는 “2014년 정부가 국회 예산안을 올린 것을 검토해 보면 내년 장애등급 단순화로 인한 예산 증가액이 반영되지 않음으로 그 신뢰성을 상실하고 있다.”며 “정부의 정책 등의 방향과 성격은 예산의 규모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만큼 적극적 추진 노력이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이어 “장애인권리협약의 내용이 구체적인 입법적 조치와 예산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적절한 입법적·행정적 및 기타 조치와 기존의 법률, 규정, 관습 및 관행을 개정 또는 폐지하기 위한 입법을 포함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협약 내용은 국내적으로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질타했다.

특히 정부보고서 작성 내용과 다르게 정책이 추진되는 것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정부가 제출한 장애인권리협약 정부보고서에는 ‘의학적 판단 이외에 근로능력과 사회적 생활능력도 판단하는 종합적인 판정 체계를 새로 구축해 장애인 개인에게 적합한 사회서비스를 연계해 주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박 상임대표는 “보고서만 잘 써놓고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서는 물론 장애인권리협약 비준도 의미는 없다.”며 “민간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정부보고서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과정 속에서 보인 정부의 태도를 정확히 기재해, 앞으로의 이행력을 이끌어가는 것이 민간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여성장애인 예산 삭감, “현실을 모르는 탁상행정”

최근 보건복지부 예산 중 여성장애인 지원 사업이 삭감되면서 논란이 된 것과 관련해, 장애인권리협약에서 정하는 여성장애인 지원과 현실적 어려움을 모르는 탁상행정이라는 질타가 나왔다.

복지부 예산 중 ‘여성장애인 지원 사업’ 항목의 올해 14억5,200만 원 예산이 내년 5억3,200만 원으로 삭감됐다. 특히 여성장애인 교육 지원 사업은 2006년부터 진행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의 ‘타 부처 유사사업과 중복성’지적을 이유로 전액 및 부분 삭감이 진행됐다.

이에 대해 박 상임대표는 “전액 삭감된 여성장애인의 교육사업비는 10년 전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서 여성장애인들의 가장 필요한 요구가 ‘교육’이라는 것을 반영해 시작된 사업.”이라고 설명하며 “교육사업의 삭감이 다른 부처와의 중복 사업을 근거로 했지만, 여성장애인들은 중복으로 지원 받은 적도 없고 당사자들의 의견 또한 반영되지 않은 탁상행정.”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장애인권리협약에서는 ‘여성장애인과 소녀들이 다중적 차별을 겪고 있음을 인정하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여성장애인과 관련한 정부보고서 역시 현재의 예산 삭감 사태와 관계없이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소개돼 있어, 민간보고서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박 상임대표는 “복지부의 이번 조치는 정부보고서와 다르게 여성장애인이 다중적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정부보고서와 다른 현실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적 평가와 태도변화를 촉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가 장애인권리협약을 올바르게 비준하게 하기 위한 민간보고서 작성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장애여성네트워크 김효진 대표는 “인식제고, 건강 등 여성장애인 관련 조항에 대한 내용 작업이 필요하다.”며 “여성장애인에게 가장 절실한 바를 UN 권고사항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보고서만 보면 한국정부는 정책적으로 거의 완벽해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 체감하는 것과는 큰 괴리가 있다.”이라며 “오류와 같은 잘못이 아닐지라도 장애인들이 느끼는 현실이 누락된 것은 잘못이다. 그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민간보고서의 역할이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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