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욱 교수
박재욱 교수

“AI가 무엇인지, 그 해악이 무엇인지 우리도 아직 모른다. 그래서 규제는 시행령으로 넘겼다.”

최근 한 방송 인터뷰에서 내년 1월 시행될 ‘AI 기본법을 대표 발의한 조인철 의원이 남긴 말이다.

솔직함은 미덕일 수 있으나, 입법의 책임성 측면에서 보자면 이토록 위험한 고백도 없다.

여야 합의로 통과된 이 법안은 ()진흥 후()규제를 표방하며 대한민국을 AI 3대 강국으로 이끌 초석으로 포장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기술의 불확실성을 핑계로 국가의 책무를 행정부의 재량에 백지 위임해버린 입법의 공백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이 공백 위로 과거 우리가 겪었던 뼈아픈 정책 실패의 그림자가 겹쳐 보인다. 바로 타다 금지법블록체인 규제의 악몽이다.

우리는 이미 설익은 입법과 관료적 편의주의가 어떻게 신산업의 싹을 자르는지 목격했다.

2020년 국회를 통과한 이른바 타다 금지법(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은 혁신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대표적 사례다.

당시 국회는 기존 택시 업계의 표심과 갈등 조정의 실패를 입법이라는 칼날로 덮어버렸다.

소비자가 원하던 혁신적 서비스는 하루아침에 불법이 되었고, 한국의 모빌리티 산업은 글로벌 경쟁력을 잃은 채 갈라파고스에 갇혔다.

블록체인의 사례는 또 어떤가. 2017년 암호화폐 광풍 당시, 정부는 법적 근거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정 지침만으로 전면적인 ICO(가상화폐 공개) 금지를 선언했다.

투기판을 잡겠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결과 건전한 블록체인 기업들마저 싱가포르나 스위스로 떠나는 디지털 엑소더스가 일어났다.

기술의 본질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관리하기 쉬운 금지를 택한 행정 편의주의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내년 시행될 AI 기본법이 우려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조 의원의 말대로 구체적인 규제 내용을 모두 시행령(행정부)에 위임한다는 것은, AI 산업의 운명을 관료들의 펜 끝에 맡기겠다는 뜻이다.

지금은 진흥을 외치고 있지만, 만약 딥페이크로 인한 대형 사회적 참사가 발생한다면? 여론에 민감한 행정부는 언제든 시행령을 고쳐 2의 타다 금지법이나 블록체인 봉쇄와 같은 과도한 규제 칼날을 휘두를 수 있다.

법률이 명확한 울타리를 쳐주지 않는 한, 예측 가능성이 생명인 산업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규제 리스크를 안고 가야 한다.

또한 법안에 포함된 ‘AI 생성물 표시 의무화역시 전형적인 행정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기술적으로 식별이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에서 표시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법을 준수하는 선량한 기업에게만 족쇄를 채우는 꼴이다.

이는 블록체인 기술 자체를 죄악시하여 산업 전체를 음지로 몰아넣었던 과거의 과오를 답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질적인 부작용을 막기보다 정부는 규제했다는 명분을 쌓는 데 급급한 모양새다.

한국이 글로벌 빅테크의 테스트베드(Testbed)’가 되는 것을 마냥 환영할 일인지도 되물어야 한다.

엔비디아 젠슨 황 CEO가 한국에 GPU를 우선 공급하겠다는 것은 한국이 제조 인프라와 데이터를 갖춘, 실험하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칫 우리가 인프라와 데이터라는 원료를 제공하고, 그 과실인 지능은 미국 기업이 독점하는 디지털 하청 구조를 고착화할 수 있다.

과거 우리가 웹(Web)과 모바일 혁명에서 늦지 않게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은 치열한 내부 경쟁과 독자적인 플랫폼 구축 덕분이었다.

주체적인 소버린 AI(Sovereign AI)’ 전략 없이 외부의 자원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2, 혹은 하청 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

인터뷰의 말미가 결국 방송통신위원회 위원 구성과 검찰총장 탄핵 등 정치적 쟁점으로 흘러간 풍경은 더욱 씁쓸하다.

AI라는 문명사적 전환을 다루는 법안조차 한국사회에서는 정쟁의 소음 속에 묻히고 만다.

AI 기본법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모르니까 위임한다는 식의 백지 위임은 곤란하다.

타다 금지법이 혁신을 죽였고, 블록체인 규제가 기회를 쫓아냈다면, 이번 AI 기본법의 모호함은 그 두 가지 실수를 모두 범할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 있다.

기술은 기다려주지 않지만, 정치는 기술보다 더 깊게 고민하고 더 멀리 내다봐야 한다.

시행령 뒤에 숨지 말고, 국회가 책임지고 혁신과 안전의 구체적인 균형점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AI라는 전대미문의 쓰나미가 코앞에 들이닥치는데 지금 국회는 무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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